렛츠리뷰 당첨자에 매번 이름이 없어 길길이 날뛰는 게 일상이었던 나에게 어느날 친구놈의 제보가 들어왔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 2집에 당첨이 되었다는 것. 뭐? 내가 신청했었나. 브라운 아이즈의 보컬인 나얼이 빠져나와 4인조 그룹인가 뭔가를 만들었다길래 괜찮겠네 생각했던 적이야 있었지만 렛츠 리뷰에 신청한 기억은 사인펜으로 직직 덧칠한 것마냥 새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어쨌든 온다니, 감사. CD 살 돈이 없어 늘 네이버의 20초 듣기만 아슬아슬하게 듣던 나-컵라면도 20초는 아니다. 어떻게 그것만 듣고 곡을 살수 있겠어!-는 환호를 질렀다. 그리고 며칠 뒤, 경비실에서 택배 찾아가라는 호통이 들렸지만 나는 그게 꼭 천사의 코러스처럼 들리기만 했다.
살 뺄 생각은 하지도 않고 6층부터 1층까지 고스란히 엘리베이터만 타고 내려가 경비실에 도달한 나에게 건네진 것은 먼지가 풀풀 풍기는 상자 하나. 어라. 이거 왜...처박혔다 막 꺼낸 느낌이 들까. 살짝쿵 경비 아저씨에게 물어봤더니 아차, 오늘은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나경(나쁜경비)! 운송 중에 그랬을 거라며 횡설수설 호통인 그를 겨우겨우 잠재우고 나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성실하게 몸을 싣는다. 6층에 도달하기도 전에 상자를 뜯어버린 난, 눈만 껌벅인다.
이게 뭐야 세상에 재킷이 너무 예뻐... 흑인 소년의 반질반질한 뒤통수에 바랜듯한 노란빛과 파란빛! 빈티지 풍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엔틱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요즘 재킷 디자인들이 시들하길래 한숨만 내쉬었는데 가수 얼굴하고 노래 제목만 딱 박아 놓는 데만 있는게 아니었구나! 나는 기뻤다. 작화실 저 끝의 내 자리를 향해 달렸고 내 컴퓨터를 두드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던 친구놈을 밀쳐놓고 CD를 밀어넣었다. 분명히 다채롭고 아름다운 사운드가 울려퍼지겠지.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처음에는 와닿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다채로운 사운드. 풍부한 감정.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미친듯이 손끝으로 흘러내리는 소울들이라고 평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그 소울이 느껴지지 않고 녹아 내리는 아이스크림의 차갑고 끈적거리는 기분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몇번 더 들어봐야 하나. 아니면 뭐라고 해야하나? 나는 한참동안 고심하다가 나중에 듣기로 했다. 나중에.
브라운 아이드 소울이라며. 소울일 줄 알았다. 그러나 왠일. 재즈, 발라드는 왜 섞여 있니. 꿈벅꿈벅. 앨범 뒤쪽을 봤더니 그제서야 알겠다. 이들은 자신의 음악 한곡한곡마다 The wind, The sea, The storm, The rain...이런 소제목을 붙여놓았다. 다시한번 들어보자. 이번에는 헤드폰을 쓰고 눈을 감았다. 클래식을 들을 때만 이렇게 엄숙했는데.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나는 충분히 담긴 고요 안으로 몸을 담근다.
Intro는 정말 바람 소리 같다. 바람 소리답게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뭐 앨범을 사주셔서 감사 이런 말도 없고 가사도 없다. 그들이 음악으로 승부하려고 한다면 음악으로 부딪쳐야 정석인 것이다. 며칠 전의 '뭐야. 이건...'이라고 읊조리던 마음은 싹 사라지고 이제는 온화한 마음만 남더라. 음음.
My story는 이들이 일종의 앨범 대표곡으로 내세운 곡이다. 난 이 노래보다 9번 트랙이 더 좋았지만 친구들은 다 이 노래를 극찬하더라. 왜 그런가 싶었는데 확실히 그럴만 하다. 각자의 특징, 멤버들의 특징이 독특하게 드러나면서도 부드럽다. The wind의 부제를 달만하다. 아니, 대전제인가? 기타와 베이스. 부드럽고 깔끔한 보컬의 목소리. 다채로운 스트링의 조합. 아. 이것때문이었구나!
가사를 먼저 읽고 나서 음악을 듣는 나였지만 늘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가사는 단순할 수록 인기가 많다. 아니. 인기 지수가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My story는 적당히, 그러니까 음악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바람에 실려오는 나지막한 멜로디처럼 -새하얀 백지에 검은 음표를 깨끗하게 새길 수 있는 것처럼,가사를 흥얼거릴 수 있다. 맘에 든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다. 바람을 볼 순 없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어, 어디로 향하는지 마음을 볼 순 없지만 누구나 알 수 있어. 도시 빌딩 숲.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들은 과연 자연적인 것일까. 그런 것을 느끼기도 전에 우리는 퇴화해 버렸다.
Wind라는 주제가 너무 맘에 들어서일까. 나는 좀처럼 다음 주제로 넘어가지 못하고 5번 트랙의 '오래도록 고맙도록'을 튼다. 발라드 풍이 조금 가미된 이 음악은 우리 나라에 흔한 발라드같지 않다. 너무 소몰이(죄송)도 안 하고 너무 빽빽 지르지도 않는다. 너무 사랑해 사랑해만 연발하지도 않고. 되려 들으면 상대방이 더 부끄러워지는 음악들이 다수인 이 나라에서 묘하게 내 얼굴을 붉히지 않고, 마치 노년부부의 황혼처럼 편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 음악이라 할 수 있겠다. 노래방에서는 부르기 힘들겠다. 쩝.
그리고 겨우 The rain의 주제를 거치는 Through rain으로 접어든다. 8번 트랙의 '추억 사랑만큼'은 이 2집의 가사들 중에서 두번째로 가사가 짧은 노래다. 남녀 보컬의 하모니가 아름답게 서로를 감싸안는다. 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 또 동시에 많은 것을 빼앗는다. 무언가를 기억해내게 해주는 동시에 무언가를 잊게 만든다. 이 노래는 그것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비 내리는 도중...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원숙한 경험에 빗대어 그냥 '날 사랑해줘! 나도 널 사랑하니까 ㅎㅎ'라는 주제에서만 빙빙 돌지 않고 완성된, 완숙한 계란처럼 노오란 살을 내보인다.
내가 가장 맘에 들어하던 9번 트랙의 sweet thing! 왠지 들을 때 CCM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말 그럴줄이야. 가사를 보고선 조금 눈을 껌벅거렸다. 솔직히 내가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가 가요에 괜히 자신의 종교를 덧대어 곡을 내는 것. CCM 앨범을 따로 내란 말야. 음색을 좋아했던 내 마음이 식으려던 찰나 다이나믹 듀오와 에픽하이의 깔끔한 랩과 보컬의 목소리. 아이들의 귀여운 코러스에 뽁 빠져버린 나로서는 어쩌나. 음악이 좋으니까 봐준다 이런 소리나 해먹어야지.
그다음은 The storm. 마치 최종보스처럼 딱 마지막 트랙에 홀로 버티고 서 있는데, 부제도 완전히 THE LORD IN THE STORM...
가사도 목사님이 써주셨고 제목도 딱 그렇다. 가사의 반은 영어고 반은 한글. 분명 나중에 교회에 가면 청년부에서 불러 제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진다.
아. 제발. 처음처럼 해주면 안될까? 사운드 좋은 것은 알겠어. 나름 다른 음악으로 진화하기 위해서 아이돌 그룹이 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같은 음악 계속 카피해서 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겠어. 그런데 CCM은 CCM 앨범으로 따로 내지 왜 여기다가 내는거야... CCM도 음악의 한 장르지. 그 한 장르를 다룬다는 것도 좋겠지만 불교인 내 친구는 계속 난색을 표하더군. 앨범을 사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사람들이 주장하지만 좀 어이없지. 연꽃등 노래같은 거 불러서 앨범에 넣어놓으면 공평하겠네. 개개인의 종교에 떡 놓아라 감 놓아라 할 생각은 아니지만 공인으로서 대충의 분별력은 갖춰 주었으면 좋겠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2집을 집어들던 내 친구는 결국 내려놓았고 한숨을 쉬면서 락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이게 내 약점일 지도 모른다. 보수적이라는 것. 그런데. 솔직히...그러면 CCM처럼 완벽하게 하지말고 거기다가 발라드 재즈 그런 것을 섞으면 되지 않았을까? 가사도 좀....
좋은 점도 많았지만 아쉬운 점도 많았던 브라운아이드 소울 2집. 다음 3집은 나얼이 군대에서 나온 다음에야 가능하겠지만 기대할 뿐이다. 총총. 리뷰 끝.^>^